현실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현실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각자 가장 직접적인방법으로 자기 세계의 층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단순한 원칙을 세상에 적용하려고 애쓴다. 내가 방향을 바꾸면 나는 그쪽으로 간다. 내가 이 쪽을 누르면 그 자리가 들어간다.그러나 세상만은 왠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세상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아나 버린다.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어쩌면 현실은 전혀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너무 깊숙히 우리를잡고 있어 이런 새로운 발상을 하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방식만 밀고 나간다.
그런 결과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고, 원하지 않는 일만 일어난다. 때로는 세상이 나에게 악의를 품고있어
분풀이를 하는 듯이 느껴진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불쾌한 사건들을 끌어오고 있는 것 같다. 걱정은 실현되고
나쁜 예감은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고집스럽게 우리를 뒤쫓아온다. 왜 그런 것일까?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 1~2권”에서 싫어하고 꺼리는 마음이 강렬할 때 '원치 않는 것을 얻게 되는' 메커니즘을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위협받는 것 같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그를 미워하지 않는가? 바로 그런 것이
당신에게 외부의도를 넘치도록 풍부하게 공급해주는 것이다.
영혼과 마음의 일치에서 나오는 사념 에너지는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준다. 바꿔 말해서, 영혼의 느낌이 마음의
생각과 하나로 일치하게 되면, 방사되는 사념 에너지의 매개변수와 일치하는 가능태 공간의 섹터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만 불길한 예상이 실현되는 유일한 원리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문제가 없는 삶이 평범한 삶이다
만일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가능태의 흐름을 따라 나아가면 만사는 아무런 걸림없이 평온하게 펼쳐질 것이다.
자연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남을 불행하게 할 생각도 없다.
비람직하지 않은 상황과 사건들은 “잉여 포텐셜”이 주변의 에너지 환경에 왜곡을 일으키고, 의촌적인 관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결과로도 일어난다.
잉여 포텐셜은 이떤 것에 대해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의존직인 관계는 사람이 자기를
다른 사람과 대척하고 경쟁하며 당신이 이것을 해주면 나는 저것을 해주겠다는 식의 조건을 만들기 시작할 때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다.
왜곡된 평가가 다른 것과 비교되지 않고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잉여 포텐셜 자체는 염려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대해 당신이 중요성이 부여하였다면 그것이 다른 것과 비교되는 순간 양극성이 생겨나고
그것은 균형력의 바람을 일으킨다. 균형력은 발생한 양극성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균형력의 활동은 대부분의
경우 그 양극성을 창조한 사람에 대항하여 작용한다.
다른 것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건 없는 포텐셜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 나는 착하다. 너는 나쁘다.' 이런 평가들은 비교와 대립에
근거하지 않는 한 자기 충족적이고 비교되지 않기때문에 균형력을 만들지 않는다.
이제 의존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포텐셜의 예를 보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너희들
누구보다 내가 더 훌륭하므로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착하므로 너는 나쁘다. 네가 나쁘니까 나는 착하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싫어한다. 너는 나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혐오스럽다.'
첫째 보기와 둘째 보기의 평가들은 그 차이가 대단히 큰 것이다. 비교에 근거한 평가는 양극성을 발생시킨다.
균형력은 대립하는 양극을 서로 맞부뒷치게 하는 방법으로서 불균형을 제거한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다.
[영혼과 마음의 일치 ]
당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영혼뿐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
이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영혼 또한 그런 파국을 내다보고 있다
면, 그것은 어김없이 현실 속에 등장할 것이다. 영혼과 마음이 함께 동조한 것은 꼭 실현되고
야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산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영혼이 어떤 선택에
긍정적 신호(느낌)를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지를 안다. 지금까지의 방식을 뒤집어서 영혼의 순수한 의도에다 자신의 마음
을 복종시킨다면, 당신은 원하는 일이 저절로 벌어지는 행운의 흐름 위에 올라타게 될 것이
다.
[ 잉여포텐셜과 균형력 ]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밤낮으로 갈구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강렬한 에너지의 불균형을 초래
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의 에너지 법칙은 당신이 어떤 결과를 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주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든 말든, 그저 안정된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면 그뿐이
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과 달리 종종 우리를 정반대의 현실로 데리고 가는 이유이다.
외부의 그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도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내면의 그 어떤 기준이
나 판단, 목표에도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무언가를 끌어오려는 힘겨운 노력으로
에너지의 기압차(잉여포텐셜)를 발생시킨다면, 곧 평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우주의 균형력이
가동될 것이며, 그때 당신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때문에 불쾌한 일이 초대라도 받은 듯,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만나 마치 서로에게 벌이라도 주려는 듯 부부가 된다. 모임에 가면 어딜가나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꼭 한 사람씩은 있다. 머피의 법칙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싫은 이웃은 공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필수조건이 되어비렸다.
괴롭히는 이웃사람의 예는 양극성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평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의
영역에 가장 직집적인 관런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평안한 삶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것일까? 언제 어디에서나 착한 사람이 조용히 살도록 놔두지 않는 나쁜 사람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서 대치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만일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을 나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의 이웃들도 대부분
당신과 똑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은 균형력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당신이 싫어하는 쪽으로 불게 된다. 바람의
방향은 당신이 싫어하는 모든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는 잔인한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당신을 짜증나게 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혹시 당신은 그를 짜증나게 하지 않았는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자들은 나쁜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평가는 비교와 대조에서 나오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웃은 당신에게 화내지 않을까? 당신이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해주겠다. 이웃이 당신에게 짜증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은 당신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예요! 그들이
그런 식으로 몰염치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거예요.”
이런 관계 속에서 당신은 양극성을 발동시키게 된다. 당신은 새로운 불행을 계속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아진다.
하지만 이웃은 당신에게 별 흥미가 없기 때문에 당신과 그들 사이는 물과 기름 사이와 같다. 그들은 당신에게
상대적인 평가를 부여하며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당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당신을 그들 세계의 층에 포함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이웃은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고,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당신과의 관계에서 양극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이웃으로서의 당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교
하기 시작한다. 만일 그것이 그들을 홍분시키고 화나게 한다면 당신도 이제 그들을 찌증나게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웃에서 못된 이웃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예상 못하지만 그 행동은 이웃에게 불쾌감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이웃을 화나게 만들 것이다. 그와 똑 같이 당신의 이웃은 자신이 지금 당신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동주택에서 소음은 가장 골칫거리다. 당신이 그것을 못마땅해 할수록 그것은 더더욱 당신을 힘들게
할 것이다. 조용한 삶은 당신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웃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는 삶이다. 고요를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이며, 그것은 텅 빈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웃이 일으키는 소음은 당신을 균형을 깨트린다. 그러면 당신은 이웃을 증오하게 되고, 당신의 화나는 마음은
때맞추어, 그 에너지의 원천 역할을 하게 된다. 거기서 양극성을 일으키는 의존적 관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저 시끄러운 사람들, 미워 죽겠네!'라는 격한 감정이 강력한 자석을 만든다. 그 자석은 계속해서 새로운 불쾌한
자극들을 당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당신의 근처에 시끄러운 이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전의 이웃은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히 당신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장비를 갖출 것이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신 이웃의 다른 이웃
들도 저마다 기여를 하며, 만일 고요를 깨뜨린 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서로 일치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 배가
된다는 점이다.
이웃의 문제는 소음 하나만이 아니다. 당신이 주로 혐오하는 모든 대상이 문제가 된다. 이웃은 당신 집 앞에다
쓰레기로 어지럽힐 수도 있고. 불쾌한 냄새를 풍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협오감은 일반적인 인간을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물난리나 화재와 같은 휠씬 더 강력한 결과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
다른 모든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일종의 불운의 법칙이 작용한다. 특발한 중요성이 부여되어 있는 대상이나
특성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대상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중요성은 알려진 것처럼 비교와 대조때문에 강화된다. 만일 어떤 것이 하나의 극성을 갖게 되면 반드시
다른 극성이 거기에 나타난다. 양극성은 불쾌한 일을 끌어당기는 자석을 만든다. 증오를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
끌러온다. 찌증나게 하는 모든 일이 늘 따라다닌다. 지독히 싫어하는 모든 일이 벌어진다. 여기에 신기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법칙이다.
양극성은 에너지 환경을 왜곡시키고 균형력의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현실은 찌그러진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일그러진 상으로 비친다. 사람들은 어떤 원인이 균형을 깨뜨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양극성을
제거하려 하지는 않고 주변세상과 싸우려고만 대든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트랜서핑의 기본원리만 실천하면
된다.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다른 이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라. 세상 모두 존재하는데로 놓아
버리야 한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라.
자신의 욕구에 집착하면 할수록, 반대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은 더욱 강력해진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세상의 멱살을 잡고 있고 세상은 거기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에게 저항한다.
억압하고 저항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트렌서핑의 법칙에 따라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의식적으로 바꿔야 한다. 예컨대, 잠시동안이라도 이웃을
머릿속에서 지위버리고 싶다면 그들을 비난하기를 그치고 그저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보라.
이렇게 혼잣말을 하라. 이젠 신경 끄고 가만 내버려두자! 그들을 그냥 당신 세계의 층으로부터 내던저비리라.
당신이 그들에게 붙여놓은 태도의 흡판을 떼어내는 데 성공하면 양극성은 사라지고 이웃은 당신을 괴롭히는
짓을 서서히 멈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이 의존적인 관계를 완전히 잘라내 버린다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 귀찮기만 하던 이웃이 당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